그러나 그 균형이 무너질 때, 제도는 정의가 아니라 불신을 낳는다.
최근 반복되는 강력범죄 사건들을 보면, 피해자는 삶 전체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는 끝까지 익명성과 절차적 보호 속에 숨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나라의 법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특히 논란이 되는 지점은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는 경우조차 가해자의 신상 공개가 제한된다는 점이다.
폐쇄회로 영상(CCTV)에 범행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피의자가 이를 부인할 여지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신상 공개는 여러 위원회 심의와 모호한 기준에 가로막힌다.
그 사이에서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노출되고, 온라인에서는 피해자의 신상과 사생활이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가해자는 보호되고, 피해자는 소비된다.
이러한 구조는 명백히 잘못 설계된 것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중요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존재할 때 적용되는 원칙이다.
범행이 객관적이고 직접적인 증거로 입증된 경우까지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원칙의 남용이며, 결국 정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법은 현실을 반영해야 하며, 현실은 이미 기술 발전을 통해 범죄 입증의 방식이 과거와는 전혀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
- 범행 장면이 명확히 촬영된 영상 등으로 입증되고
- 피의자의 동일성이 객관적으로 확인되며
- 범죄의 중대성이 사회적 파장을 초래할 수준일 때
이런 경우에는 신상 공개를 원칙화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
더 이상 '예외적 공개'가 아니라 '조건부 의무 공개'로 전환해야 한다.
나아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피해자의 권리가 철저히 수동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사건에 대해 실질적인 통제력을 거의 갖지 못하며, 정보 공개 여부조차 타인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이는 정의의 관점에서도, 인간의 존엄성 측면에서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제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피해자의 신상이 공개된 경우, 가해자의 신상도 동일하게 공개한다"는 규칙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신상 공개를 선택함으로써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강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보복이 아니라,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고 정의 실현의 주체를 피해자에게 일부 환원하는 제도적 장치다.
물론 이러한 제도에는 신중한 설계가 필요하다.
허위 고발이나 오판 가능성, 과도한 낙인 효과 등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과도한 공개’가 아니라 '과도한 비공개'다.
제도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입법의 역할이다.
범죄는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전과 신뢰를 위협하는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권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현재의 구조는, 결과적으로 범죄 억지력마저 약화시키고 있다.
명백한 범죄 앞에서조차 가해자의 얼굴을 가려주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피해자가 침묵을 강요받는 구조에서 벗어나,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명백한 범죄에는 명백한 공개'라는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정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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