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주의의 심장이다.
심장이 멈추면 생명이 끝나듯, 선거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면 민주주의 역시 치명상을 입는다.
만약 선거 당일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면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다.
국가기관의 기본적 직무 수행 능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이다.
더욱이 선거 관리의 책임을 지는 공무원들이 선거 당일 대거 휴가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이는 무능을 넘어 직무 유기에 가까운 문제다.
국민은 선관위에 특권을 준 적이 없다.
독립성은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한 것이지 무능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다.
선관위는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더욱 역겨운 장면은 따로 있다.
바로 일부 보수 정치세력과 극우 성향 인사들이 갑자기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번 사태를 빌미로 현 정권을 공격하고, 마치 대한민국 선거제도가 이제 막 무너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들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훼손한 세력이 누구였는가?
3·15 부정선거는 누구의 작품이었는가? 국민의 표를 훔치고 권력을 연장하려 했던 자유당 정권이었다.
헌법 정신을 짓밟으며 숫자 장난으로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던 사사오입 개헌은 누구의 역사인가?
유신헌법을 만들어 국민에게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조차 박탈한 것은 누구였는가?
언론을 통제하고 야당을 탄압하며 긴급조치로 국민의 입을 막았던 것은 누구였는가?
군대를 동원해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의 희생 위에 권력을 세웠던 것은 또 누구였는가?
그 역사의 상당 부분은 보수 권위주의 정권의 역사였다.
물론 오늘의 보수가 과거와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민주주의의 역사 앞에서 겸손할 의무는 있다.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기는 커녕, 선거 관리 실패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민주주의 파괴의 주범인 양 상대를 몰아붙이는 태도는 위선에 불과하다.
선관위는 비판받아야 한다. 강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어떠한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부정선거와 독재의 역사를 가진 세력이 민주주의의 순교자 행세를 하는 것까지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민주주의는 선택적 정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오늘의 실수를 비판하면서 어제의 범죄를 잊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익을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선관위의 무능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동시에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훼손했던 역사에 대한 기억도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망각하는 순간 무너진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것은 실수보다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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